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주 4.3 사건/전개 (문단 편집) == 4.3 무장봉기와 충돌 == [include(틀:대한민국 헌정 쿠데타 및 반란)] >친애하는 [[경찰|경찰관]]들이여! '''탄압이면 항쟁이다.''' 제주도 유격대는 [[인민]]들을 수호하며 동시에 인민과 같이 서고 있다. 양심 있는 경찰원들이여! 항쟁을 원치 않거든 인민의 편에 서라. 양심적인 [[공무원]]들이여! 하루빨리 선을 타서 소여된 임무를 수행하고 직장을 지키며 악질 동료들과 끝까지 싸우라. 양심적인 경찰원, [[대동청년단|대청원]]들이여! 당신들은 누구를 위하여 싸우는가? 조선사람이라면 우리 강토를 짓밟는 외적을 물리쳐야 한다. 나라와 인민을 팔아먹고 애국자들을 학살하는 매국 배족노들을 거꾸러뜨려야 한다. 경찰원들이여! 총부리란 놈들에게 돌리라. 당신들의 부모 형제들에게 총부리란 돌리지 말라. 양심적인 경찰원, 청년, 민주인사들이여! 어서 빨리 인민의 편에 서라. [[반미|반미구국투쟁에 호응 궐기하라.]] >---- >경찰, 공무원, 대동청년단 단원들에게 보내는 무장대의 경고문 >시민 동포들이여! 경애하는 부모 형제들이여! '4.3' 오늘은 당신님의 아들 딸 동생이 무기를 들고 일어섰습니다. 매국 단선단정을 결사적으로 반대하고 조국의 통일독립과 완전한 민족해방을 위하여! 당신들의 고난과 불행을 강요하는 미제 식인종과 주구들의 학살만행을 제거하기 위하여! 오늘 당신님들의 뼈에 사무친 원한을 풀기 위하여! 우리들은 무기를 들고 궐기하였습니다. 당신님들은 종국의 승리를 위하여 싸우는 우리들을 보위하고 우리와 함께 조국과 인민의 부르는 길에 궐기하여야 하겠습니다. >---- >무장대가 제주도민에게 보내는 호소문 제주 민관총파업까지만 해도 (비록 어느 정도는 남로당의 개입이 있긴 했지만) 각 진영의 온건파에게도 호응을 얻은 민중항쟁의 성격이 강했지만, '''남로당의 무장봉기로 제주도에는 [[생지옥]]의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남조선로동당]] 제주도당은 지속적인 탄압을 받자 1948년 초부터 격렬한 찬반 논의 끝에 무장투쟁을 하기로 결정하고 준비에 들어갔다. 하지만 이 결정은 남로당 중앙당과의 협의를 하지 않은 상태였다.[* 한편 [[박갑동]]은 '제주 4.3은 북한 공산당 주도 폭동 지령에 의한 것'이라는 이른바 '남로당 중앙당 폭동 지령설'을 처음으로 주장했다. 하지만 6월 항쟁 이후 제주도 지역신문사인 제민일보에서 '남로당 중앙당 폭동 지령설'에 대한 사실 여부를 밝히기 위해 이 사람이 거주하는 일본 도쿄에 가서 취재, 인터뷰를 진행해 본 결과 박갑동 자신도 '나도 그 근거는 모른다'는 식으로 대답했다. 인터뷰에 따르면 '중앙 지령설은 내 글이 아니고, 1973년 중앙일보에 연재할 때 정보기관에서 고쳐서 쓴 것'이라고 밝혔다.[[http://www.jemin.com/news/articleView.html?idxno=260453|#]][[http://www.jemin.com/news/articleView.html?idxno=260673|#]] 그럼에도 [[극우]] 세력에서는 박갑동의 첫 주장을 계속 유포하고 있다.]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즈음에 제주도 각지의 [[오름]]마다 [[봉화]]가 솟아올랐다. 그것은 남로당을 주축으로 한 무장대가 반란을 일으키겠다는 신호였다. 곧 350여 명의 무장대가 제주도 내의 전 경찰지서 24개 중 12개 지서와 우익 인사의 집, 우익 청년 단체 등을 일제히 습격했다. 무장대는 무기를 들고 경찰, 우익 인사, 우익 청년 단체 단원, 경찰 가족 등을 공격했다. 이 일로 경찰 4명, 우익인사 등 민간인 8명, 무장대 2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 무장반란에서 무장대가 경찰과 우익 인사를 습격해 군경 일동은 긴장하였다. 4월 3일, 이 날 반란을 일으킨 무장대는 경찰과 군 병력에 비하면 상당히 약체였다. 처음 반란에 가담한 인원은 300여 명에 불과했고, 이들이 가진 무기는 일본군이 [[결호작전]]을 위해 갖고 왔다 놓고 간 일제 [[99식 소총]], 권총, [[수류탄/일본군|수류탄]] 등 소화기와 [[일본군도|군도]]와 대검 등 칼, 죽창, 몽둥이뿐이었다. 그것도 총기가 턱없이 부족하여 대다수가 칼, 죽창, 몽둥이만 들고 나섰을 정도였다.([[https://ppss.kr/wp-content/uploads/2017/04/004.jpg|경찰이 노획한 무장대의 무기들]]) 물론 이후에 군경에 대한 습격과 충돌을 통해 무기를 보강하기는 했지만 인력과 무기의 부족은 여전했다.[* 일본군 한 명의 보병장비를 여럿이 나눠서 한 명은 소총, 한 명은 권총, 한 명은 군도, 한 명은 대검... 식으로 무장했다. 한편 [[수통]]이나 [[90식 철모|철모]], [[반합]], [[전투화]]등 비전투 장비는 민가로 넘어가 바가지, 물통, 솥, 신발 등 세간으로 쓰이기도 했는데 [[다랑쉬오름|다랑쉬 굴]]에서 그 일부가 유물로 발견되었다.] 그리고 이들은 [[빨치산]]으로 군경과 우익 인사들을 공격하고, 제주도민들을 향해서 끊임없이 [[5.10 총선거]] 거부와 [[공산주의]]를 주장하였다. [[5.10 총선거]]를 1달 정도 앞두고 있던 상황이라 군경은 민감하게 반응했다. 군경은 4월 3일의 무장반란을 선동으로 인한 무장폭동으로 규정했다. 4월 5일, 미군정은 제주경찰 감찰청 내에 제주비상경비사령부를 설치했다. 곧이어 응원경찰들과 우익 청년 단체 단원들이 증파되었고, 통행금지령이 내려져 오후 8시 이후의 통행을 금지됐다. 경찰과 우익은 좌익을 더 강하게 탄압하고자 했다. 이 때문에 이들은 제주도민들과 또 다시 충돌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경찰은 진압에 소극적인 경비대를 의심하고 일부러 방화 사건을 조작해 경비대를 보내려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